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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산일기] 팔공산 종주_20240501
    등산일기 Hiker_deer 2024. 5. 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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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부터 비소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행을 취소하기엔 준비해 주신 대장님께 미안한 마음이었다.
    두 번째 대구 등산인데 두 번 다 비라니..
    이런 식이라면 다시는 대구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마음이 쓰렸다.
     
    새벽 3시 45분. 
    버스는 한티 휴게소에 도착했다.
    빗줄기가 생각보다 거세고 많이 춥다고 했다.
    대구는... 프라이팬 도시 아닌가요?
    대구와 춥다가 안어울리는 듯 하지만, 맞다! 지난주 비슬산도 추웠다. 겁나 추웠다.
    대장님은 결단을 내리셨다.
    5시까지 기다려보자고.. 예보상 그쯤이면 비가 그친다고 하니 버스에서 쉬고 간단히 요기도 하고 5시에 출발하자고 하셨다.
    다행히도 비는 윈디의 예보에 맞게 잦아들었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걷기 시작하면 금세 열이 오를 테니 출발을 감행한다.

    5시 15분, 한티 휴게소를 떠나 종주를 시작한다.
    다들 예상치 못한 추위에 가지고 온 옷을 다 꺼내입고 꽁꽁 싸맸다.

    날은 춥고, 빗방울이 흩뿌리고..
    하지만 진창길이 될 정도는 아니어서 걷기는 딱 좋았다. 속도를 늦출 이유가 없었다.
    비는 곧 이슬이 내리는 정도로 바뀌었고 어느새 그쳤다.
    공기가 정말 상쾌했다. 추위는 계속 걸으면 그럭저럭 잊혀질 정도였다.
    강풍이 불어오면 더 빨리 걸으면 그만이었다.
     

    삼갈래봉에 도착했다.
    표지석은 없지만 어쨌든 봉우리라고 한다.
    살짝 젖은길이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 싱그러운 길을 걸었던 것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옛날옛날 파계사가 있었던 곳을 지난다. 
    사진은 찍되 내용은 읽어보지 않는 쿨한 무식함 ㅋㅋㅋ

    팔공산은 흙산 돌산이 아주 멋지게 어우러진 산이다.
    무등산 혹은 속리산에서 볼법한 섞박지 같은 바위들이 꽃꽂이하듯 무심하게, 하지만 시크한 멋을 뽐내며 툭툭 꽂혀 있는 곳이 많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깍두기, 섞박지 바위 성애자! 저요 저요!!

    비 온 뒤 등산은 무조건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다 상쾌하다.

    파계봉 도착.
    고도 991m. 얼마 오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900 고지라고요?
    한티 휴게소가 700 정도 고지에 위치해 있단다.
    이 종주 개꿀!!! 인가 싶지만 종주를 마치고 기록을 보니 그래도 등반 고도가 1,420m였다.
    20km 산행을 하는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며 1400미터나 쌓았다.

    파계봉을 지나 헬기장이 나온다. 갑자기 눈앞이 뻥 뚫리니 일출이 아니었음에도 일출을 만난 듯!
    오늘을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암릉이 많은 산답게 사진 찍을 곳이 정말 많다.
    오늘은 28인승 버스 한 대를 다 채우지 못하고 18명 정도가 함께 산행을 했는데 10명 줄었다고 그 부피감(?)과 중량감이 매우 가벼워졌다.
    그래서 산행을 하며 제법 많은 사진을 남겼다.

    파란 하늘은 아니었지만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하늘이었고
    5월의 연둣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게다가 산세가 정말 너무 예뻤다. 
    대구 최고의 명산답게 웅장함이 압도적이다. 

    날카롭게 솟은 톱날바위능선은 앞에 두고도, 지나가면서도 지나와서도 탄성을 자아냈다.

    돌풍 수준으로 바람이 불어와 움직이는 내내 심장이 쫄깃했지만 안전 지지대를 잡고 돌풍에 대항하는 비명과 꺄르르 웃음을 동시에 터뜨릴 만큼 신나는 길이었다. 

    뾰족한 바위능선에 올라 조망하는 사방팔방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나.. 어제까지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있자니 발아래 세상의 시름을 잊어야만 할 것 같았다
    배신과 버려짐의 쓴맛에 울지도 못할 정도로 분노에 쌓여있었는데 이 따위 일에 내 마음을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너덜너덜 해졌던 마음을 그러모아 본다.

    도립공원이었던 팔공산이 작년에 국립공원이 되었다.
    국립공원 승격 후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을 리는 없고 원래도 참 관리가 잘 되어있는 산인 것 같다.

    등산로들이 국립공원 품격에 걸맞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물론 정상석들이 중구난방으로 늘어져 있는 것은 좀 의아하긴 했는데 
    이건 또 나름대로 사진 찍는 재미가 있었다.

    서봉에 도착했을 즈음 돌풍이 정점에 달했다.
    바람과 싸우며 한걸음 한걸음을 힘겹게 내디뎌야 하는 정도였다.
    머리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밀어내듯 황소와 같은 걸음을 걸어야 했다.
    서봉 정상석 뒤쪽엔 사진을 꼭 찍어야만 하는 멋진 스팟이 있었는데 결국 그곳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균형을 잃고 넘어질 강풍이었다.

    임산부인줄... 🤣🤣

    서봉 정상석을 찍고 몇 걸음 움직이면 또 삼성봉 정상석이 나온다.
    팔을 내밀어 정상석 사진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 해지는 거센 바람.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할 일을 다 했다는 뿌듯함을 안고 다시 바람과 싸우며 길을 걷는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
    팔공산은 소원빨이 기가 막힌 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들 좌상에 이르러서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나도... 빌었다.
    처음에는 그 인간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소시오패스는 미워하되 나 자신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내 마음이 부디 평온하게 해달라고...
    이런 곳에 오면 늘 가족의 건강을, 경제적인 풍요를 간절히 빌어왔는데 오늘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내 마음을 위한 소원을 간절히 올려보았다.

    팔공산 비로봉-블랙야크 100대 명산 예순세 번째 인증

    비로봉은 가던 길에서 살짝 빠져나와 올라가야 했다.
    비로봉에서 인증을 하고 아침 요기를 했다.
    이른 아침 버스에서 간단히 먹고 나와 점심때까지는 배가 안 고프겠거니 했는데 어찌나 배가 고픈지....
    나만 그런지 알았더니 다들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비로봉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와 동봉으로 향한다.
    비로봉이 개방되기 전에는 팔공산의 정상은 동봉이었다고 한다. 

    옛 정상석을 펭수와 함께 사진을 남기고 다시 또, 아름다운 팔공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더울라치면 어김없이 강풍이 불어왔다.
    이렇게 긴 산행을 하면서 땀이 안 나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그 대단한 종주를 내가 하고 있었다.

    이곳이 염불봉임은 산악회에서 남긴 팻말 두 개가 다인 염불봉에 도착했다.

    염불봉이 많이들 찾는 곳이 아니어서 염불봉 가는 길도 험난했고 염불봉에서 빠져나와 정식(?) 등산로로 돌아오는 길도 매우 험난했다.
    자꾸 이런 험한 길에서의 짜릿함과 쫄깃함이 좋아진다. 경계해야 한다.
    이러다 암벽등반 한다고 나설 판이다.

    염불봉 큰 바위.
    시간이 많고 바람만 덜 불었다면 이곳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도 너무 좋을 곳.

    흔들바위라고 아무도 명명하지 않았지만 이름을 가진 흔들바위들보다 더 위태위태해 보이는 바위를 밀어 본다.
    절대 세게 밀지 말고 미는 척만 해보라는 언니오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슬쩍 두 팔을 얹어본다.
    손을 대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위험해!!! 조심해!! 라며 아우성이다.
     
    여러분! 진짜 흔들릴 것 같은(어쩐지 너무 위험해 보여서 시도조차 못해봄 ㅋㅋ) 흔들바위가 팔공산에 있습니다!!!

    염불봉에서 돌아오는 아찔하고 다이내믹한 등산로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종주하는 내내 멀리 보이기만 했던 정자에 도착하게 된다.
    이 정자에서부터의 산행은 오로지 갓바위를 위한 길이다.
    모든 안내표지는 갓바위만을 보여준다.
    갓바위를 향해가자.
    수험생을 위한 소원의 성지! 갓바위로 가자.
    정자에서부터 갓바위까지는 6.06km.

    한참을 더 오르고 내리고, 또 올라갔다 내려가야 한다.
    해가 중천으로 향해 가는데도 더위 따위 전혀 모르겠고요.
    바람이 불면 여전히 추웠다.

    남쪽 어느 산에서 인가 처음 인지하게 된 풀들이 이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살랑살랑 유연하게 눕는 풀들.
    풀로 둘러싸인 등산로는 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준다.
    산이 아니라 넓은 초원에 있는 기분이 든다.

    풀이 눕는 길을 지나 삿갓봉에 도착.
    - 여기가 어디? 
    - 덕유산 삿갓봉!
    산쟁이들만 할 수 있는 아재개그를 하며 들썩들썩 신이 났던 삿갓봉.

    삿갓봉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등산객들이 눈에 띈다.
    이곳까지 15km 산행을 하는 동안 만난 등산객이 다섯 명도 안 됐다.
    팔공산을 우리가 전체대관한 느낌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을 참으로 오래 걸었다.

    이 세상에 우리 열여덟 명만 오롯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가 산객들을 만나니 다시 속세로 나온 기분이다.
    갓바위와 가까워질수록 마주치는 사람이 많아졌다.
    산객끼리 건네는 인사에 다시 익숙해질 즈음, 갓바위로 가는 계단에 이르렀다.
    석가탄신일이 가까워서인지 연등이 주렁주렁, 장관을 연출한다.

    갓바위는 팔공산의 또 하나의 봉우리인 "관봉"이다.
    우리 종주의 마지막인 갓바위, 관봉에 다시 도착했다.

    또다시 간절함 바람을 남긴다.
    부디 올 한 해 나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소시오패스에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그런데.. 소시오패스 이런 애들 원래 똑똑한 거 아닌가?
    왜 나는 멍청한 소시오패스를 견뎌야 하는가..
    아.. 나 지금 등산 중이지. 잊자. 잊어.

    갓바위에서 속세까지는 1,365 계단이다.
    1년 365일을 형상화 한 계단이라고 한다.
    너무 끼워 맞춘 거 아니냐며 웃었지만 1,365 계단이면 딱 운동하기 좋은, 오르다 보면 세상 시름 다 잊혀질 숫자구나 싶다.
     
    대개 갓바위에 오는 사람들은 1,365 계단을 올라오지만 산에서부터 내려온 우리는 1,365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높이가 균일하지 않아 내려가기에 썩 좋지 않을 계단이었다.
    자식 손주들을 위해 썩 좋지 않은 이 계단을 오르고 내렸을 어르신들의 간절함이 더욱 사무친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올리는 분들도 경건했지만 갓바위 입구의 바위에 이마를 대고 빌던 분의 뒷모습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많은 이의 소원과, 나의 바람이 남겨진 곳을 떠나 마침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즐겁고 유쾌했던 종주가 끝났다.

    황매화가 만개한 1365계단의 들머리

    올 한 해,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쓸 시간 속에서 무너지려 할 때마다 돌아보며...
    내가 두고 온 간절한 바람을 되새겨야지.


     🎯팔공산 오르기🎯
    ✔️산행시간 : 8시간 22분
    ✔️산행거리 : 20.31km
    ✔️산행코스 : 한티재-파계봉-마당재-서봉-오도재-팔공산(비로봉)-염불봉-은해봉-선본재-노적봉-갓바위(관봉)-갓바위휴게소
    ✔️팔공산은 꼭! 소원길 종주로 다녀오세요~
    ✔️장갑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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