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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여행 1일차] 12년만의 방콕(#암환자 #칠순노모)
    내가 있던 그곳 2025. 9. 29.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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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고 하찮은 의식의 흐름이 지배한 12년 만의 방콕

    내가 급격하게 시무룩해진 것은 인천공항에서 면세품을 수령하고 나서이다.

    나는 다이슨 에어랩 i.d를 무려 44만 원에 구매했다(싼데 비싸고 비싼데 싸다)
    역대급 수준의 최저가일 것이다.
    올초에도 50만 원대 초반의 금액으로 다이슨 볼륨버전을 구매했다가 제품의 도장이 깨진 불량품을 받는 바람에 환불했었다.

    그러고 나서 드라이기에 무슨 수십만 원을 태워-
    라는 생각으로 코스트코에서 39000원짜리 드라이기를 사서 무려 13년 만에 새 드라이기의 놀라운 성능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다이슨 면세금액이 저렴해졌다며 던져준 링크를 무지성으로 구매한 것이다.

    면세품인도장에서 다이슨을 찾아든 순간, 우울함이 밀려왔다. 사은품까지 합치면 6kg에 육박하는 무게이다. 이걸 이고 지고 18일 동안 여행을 다닐 생각을 하니 기운이 쑥 빠지면서 내가 뭐 하자고 이걸 샀으며, 이렇게 비싼 돈을 헤어용품에 태워...
    (게다가 진에어 수화물 15kg은 이미 인천공항에서 달성해 버렸다. 무게의 압박감도 시무룩에 한표 더했다)

    무거운 마음과 무거운 짐을 가득 들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륙 후 안전벨트 등이 꺼졌을 때 의자를 뒤로하려고 보니 의자에 버튼이 없다. 요즘 저가항공은 의자 고정인가 봐 쑥덕쑥덕 하는데 앞자리 의자가 뒤로 쑥 넘어온다.
    승무원을 불러 물어보니 우리 자리는 비상구 자리라 의자가 고정이란다.

    고정된 의자로 다섯 시간 반의 비행을 한다는 것은 극형에 처해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 셋은 정말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고 호불호를 비롯해 모든 의사표현을 하지 않아 여행 때마다 우리를 속 터지게 만드는 엄마조차도.. 갈 때도 저 비행기를 타야 하느냐, 저거랑 아시아나나 대한항공이랑은 가격차이가 얼마나 나느냐며 괴로웠던 기억에 치를 떨었다.

    비행기 좌석 지정조차도 사전에 정보를 습득하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는 것 참 팍팍하네.
    힘겨운 비행으로 우울함의 무게가 또 늘었다.

    그리고 새벽 한 시에 체크인한 에어비앤비.
    3인실 호텔이 마땅찮아 슈퍼호스트가 운영하는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노르웨이 여행할 때 경험했던 슈퍼호스트의 만족감을 기대했는데...
    방콕 슈퍼호스트.. 하아.. 기준이 뭐냐능.
    화장실... 냄새남.
    세탁기-냄새나는 정도가 아니라 재난임. 세탁기는 사용하면 병 걸릴 것 같은 위생상태인데 수건을 인당 두 개씩 준다. 5박에 수건 두 개. 세탁기 사용 못 함.
    그나마 집에서 수건을 한 사람당 두 개씩, 총 6개를 챙겨 왔으니 망정이지 진짜 매일밤 수건 손빨래할 뻔했다.

    태국 에어비앤비의 슈퍼호스트에 대한 이미지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여러모로 우울.
    대충 정리를 하고 잤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나갈 준비를 한다.

    집 앞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12년 만의 방콕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의 12년 전 방콕은 가족여행이자 우리 아빠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처음 해외에 나와본 아빠, 아빠의 입이 짧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여행하는 내내 한식당을 찾느라 모두가 곤욕을 치렀다.

    12년 만의 짜뚜짝시장은 볼 게 없었다.
    한국의 여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일드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덥긴 더웠고 공기 순환이 안되는 좁디좁은 시장골목을 걷는 것이 썩 즐겁지 않았다.
    작년 발리에서 이미 느낀 것이었다.
    싸고 저렴함으로 상징되는 동남아의 물건에 관심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누가 좋다고 하면, 누군가 사 왔다고 하면 우리도 무조건 사 오곤 했었는데 지금은 물욕이 사라졌고 저렴한 물건을 이것저것 많이 쟁이는 것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동남아 여행에 대한 즐거움이 절반이상 날아간 것 같았다.
    짜뚜짝 시장을 돌며 저렴하고 가치 있는 제품을 찾아내는 것에 관심이 사라지자 비좁고 습한 시장골목의 무더위만 남은 것이다.

    넓디넓은 옛 짜뚜짝시장 옆에 짜뚜짝시장 건물이 들어섰다.
    조금 비싸지만 시원한 실내.
    바로 실내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다가 옥수수를 샀다.
    아빠가 태국에서 가장 거부감 없이 드셨던 것이 구운 옥수수였다.

    버터볶음(실은 마가린) 옥수수와 그냥 찐 옥수수를 사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 이제 우리 뭐 한담?
    고민하다가 전철을 타고 오며 본 거대한 시암역이 생각나 방콕, 시암으로 검색했더니 우리가 의도했던 시암역 인근이 아닌 아이콘 시암 관련 내용이 죽 이어졌다.
    별생각도 계획도 없으니 아이콘시암 가자!!

    그랩을 타고 한 시간을 이동해 도착한 아이콘시암.

    아무것도 모르고 왔는데 13년 전 묵었던 쉐라톤 호텔 바로 맞은편이었네. 끝내준다 무계획 무정보 여행.

    아이콘시암은 쇼핑몰.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쇼핑몰이었다.
    쇼핑몰 한층 한 층을 돌다가 마침내 현타가 세게 왔다.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럴 거면 굳이 동남아까지 와야 할까?
    한국에서 매일 운동이나 하면서 늘어져있을걸.
    마지막 우울 한 스푼이 더해지면서 끈이 툭 끊어져버렸다.
    - 나, 동남아는 마지막이야.
    했더니 동생도 마찬가지란다.

    아주 잠깐 신났던 한국에는 없는 온러닝 매장방문.

    발리에서야 비가 너무 많이 와 쇼핑몰 투어를 했다지만 비도 오지 않은 오늘 방콕에서, 길거리를 걷자니 더위와 습도를 이겨낼 만한 흥미요소를 찾지 못했고 쇼핑몰을 돌자니 굳이 동남아까지 와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어쩐지 오늘 하루 종일 피곤하고 배가 고팠던 나.
    왜 이렇게 허기가 계속될까 고민하다가 때마침 머리를 스친 우리의 식사장면.
    엄마와 동생은 남들보다 밥을 빨리 먹는다. 나는 남들보다 많이 느리다. 내가 엄마, 동생보다 두세 배는 느리게 먹는 편인데 음식을 같이 먹다 보니 어??? 하는 사이에 음식이 동나버린 게 오늘 하루 종일 우리의 식사패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한 스푼 한 스푼 우울함을 더해서 나락에 떨어져 버린 것 같은 여행 중이던 나는 이 어둡고 음침한 우울의 원인이 조금씩 더해진 자잘한 이유 때문이 아닌 배고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만다(물론 어제부터의 험난한 일정이 우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우울을 오래 이고지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정말 하찮고 하찮은 나의 의식.

    엄마와 동생도 심히 공감한 나의 생각에 우리는 저녁식사 때 음식을 셰어 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음식을 먹었다.
    오늘 처음으로 나는 배부름을 느꼈다.
    와... 동남아 여행 와서 먹을게 부족해 내내 허기에 시달리고 그게 우울함으로 이어질 줄이야!
    배가 부르자 세상이 아름다워졌다.
    전 세계 어디에 가도 있을법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것도 즐거웠다.

    예약해 둔 마사지샵 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 꼭대기층까지 올라간 아이콘시암. 아이콘시암의 백미는 7층이었다.

    취향 저격인 재즈음악이 흐르는 옥상정원. 미슐랭 식당이 모여있는 6층 식당가.

    번쩍번쩍 휘황찬란한 디너크루즈.
    무반응이 여행컨셉인 엄마가 디너크루즈를 가리키며 너무 멋지다고 했다.
    그래서 뭐다?
    무계획인 우리는 내일 디너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내가 방콕에서 디너크루즈를 탈 줄이야.
    오래 살고 볼일이다.
    허기를 해결하고 아이콘시암 옥상정원의 음악과 화려함에 흥겨워졌고 아이콘시암 근처의 NIKKO마사지샵에서 타이 트레디셔널마사지를 받고 한껏 고무되었다.

    그래- 이 맛에 동남아오지!!

    PT쌤이 잘 풀어줘야 한다고 했던 많은 부위들을 다 포함하고도 온몸 구석구석을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압으로 지그시 마사지해 준 니꼬 타이마사지!

    비로소, 나는, 여행자들의 천국 방콕에 와 있음이 실감 났다.
    그리고 수술 후 꽤 오랫동안 십분 걷는 것도 힘겨워했던 엄마는 생각보다 오늘의 일정을 잘 소화해 주었다.
    엄마 체력이 너무 안 좋아져서, 고민하는 동생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이번 여행 함께하겠냐고 엄마에게 제안했던 나는 동생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가끔은 짜증을 내는 동생에게 엄마와 함께하는 마지막 해외여행일 테니 이번만 참자며 동생을 달랬었다.

    혹시나 엄마가 취소할지도 몰라 숙소 예약도 미뤘었는데 우리는 결국 십이 년 만에 함께 다시 태국에 왔다.
    함께 오길 잘했다.
    AI에게 물어봐 받아둔 칠순 노모와 두 딸이 함께하는 일정은 도움이 하나도 안 됐지만 우리는 우리의 속도로 하루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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